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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의 시
글쓴이 : 뷰티라이프 날짜 : 2020-10-23 (금) 11:17 조회 : 1574

이 계절의 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계절, 가을입니다. 천지는 온 세상의 염색약들이 모여 저마다의 때깔을 자랑하는 듯합니다. 이 계절에 맞는 아름다운 시 몇 편 읽으며 우리의 삶도 아름답게 살찌워봅시다.

 

가을이

오인태(1962~ )

 

마치 낙하산처럼 내리는군요

보세요. 하늘에서부터 무수히

반짝이며 흩날리며 펼쳐지며

구르며 지상에 당도하는 가을

게릴라들의 무서운 화력은

수액이든지, 혹은 사람의

눈물이든지 젖어 있는 것들을

순식간에 말려서 검불처럼

활활 태워버리고 마는 걸요.

늘 이렇게 낙하산처럼 내려

지상의 곳곳을 일시에 방화하며

덮쳐 오는 가을, 가슴에도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번진 걸요.

그래도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

몸의 모든 수분이 마르며

타며 바스러지는 이 쾌감

 

이제 누군가를 흘릴

눈물 한 방울 안 남기겠지요.

 

 

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건

김경래(1962~ )

 

내가 할 수 있는 건

 

볕에 쪼그리고 앉아

무딘 발톱을 깎거나

마당가 사시나무에 걸린

은빛 햇살을 털어

분홍구절초 꽃잎에

윤이 나도록 물을 주거나

 

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건

 

코스모스 닮았던 너를 생각하거나

가을볕을 따라 바다로 떠나거나

 

가을에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대 없는 바다로 가

새파랗게 날이 선 쪽빛에

이유 없이 생살이 베여

속으로 우는 것

 

 

내장산

심종록(1959~ )

 

밤새워 쓴 안부 부칠 곳 없는 아침 단풍나무 우듬지만 붉어졌다

별들이 흘린 생애가 가파르게 흐르다 얼어붙는 데크길

모주 한 잔에 속 풀린 술꾼마냥 햇살 든 자리 모락모락 입김이 솟고

정처의 방향을 따라 피고 지는 송엽국 붉다

 

그래도 그늘은 두터워 햇살 미치지 않는 부근엔

무심을 가장한 서리, 그리고 생은 홀가분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서

윤슬 반짝일 때마다 무거워서 휘어져버리는 물길 따라

월세 밀렸다고 득달같이 달려와 재촉하는 건물 관리인 같은 가을

 

도대체 타들어가는 속을 보여 줄 방식이 없는

 

 

가을 강가에서

이은숙(1953~ )

 

평생을 강물로 흐르고 싶었다

그대 혈관 속을 흐르는

도도한 강물이고 싶었다

 

쉬지 않고 바다로 흐르는 동안

나는 뜨거운 피가 되어

그대 살 속 단단한

한 점 티 눈으로

박히고 싶었다

 

 

가을엔 아프지 말자

왕은범(1959~ )

 

제발

아니, 부디

가을엔 아프지 말자

단풍들도 아파 저리 붉게 타거늘

너마저 아프면

가을은 어찌하라고

사람아

가을엔

제발

아. 프. 지. 말. 자.

아프려거든 차라리

하얀 겨울에

나목裸木처럼 아프자

 

*아름다운 시를 주신 다섯 분의 시인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뷰티라이프> 2020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