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초대석(유종인 시인)
이전의 시집과는 다른 지향점을 지닌,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출간한 유종인 시인
-본인 소개 부탁합니다.
시를 쓰고 있어요. 우리나라 정형시인 시조도 씁니다. 얼마 전서부터는 동양미술에 관심과 애호가 있어 미술평론도 함께하고 있어요. 물론 시가 원천입니다. 전업으로 글 쓰며 살고 있어요.
-이번 시집을 소개하면?
이번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 시쓰기의 하나의 변곡점이 되는 시집이 아닌가 싶어요. 시집의 분위기는 약간의 고풍스러움, 번민과 번다함을 풀어가고자 하는 마음의 방식, 오래된 동경(憧憬)을 새삼스레 되새기는 그리움, 생활의 어려움을 다감하게 풀고 품어보고자 하는 용심(用心), 주변 자연과 사물과의 친교와 친밀함을 돈독히 하고자 하는 소소한 관심 등이 이 시집이 지닌 뉘앙스가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읽기에 따라서 달리 그리고 또 다른 이면이 있을 수 있으리라 봐요. 무엇보다 이전의 시집과는 좀 더 다른 지향을 그려보고자 했으니 그것은 오래된 새로운 조망이랄까 전망, 가만한 바람 같은 것이겠지요. 이것은 구체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의 바탕처럼 생의 눈망울을 그윽하게 하려는 나름의 요소라 할 수 있어요.
-시집 제목이 독특한데...
시집 제목은 출판사 편집부에서 추천해주셨는데, 언뜻 느낌이 좋아서 바로 오케이를 했어요. 문장 제목을 잘 쓰는 편은 아닌데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수긍이 가더라구요. 이번 시집 출판은 오래전에 문학동네와 계약이 돼 있었던 것이구요, 너무 늦은 건 아닌가 하고 지난 겨울에 문의했는데 가능하다고 해서 내게 됐어요. 처음 보낸 원고가 맘에 안 들어서 도중에 상당 부분을 덜어내고 새 시편을 넣었어요. 번거롭게 했는데도 잘 진행해주신 편집부와 발문 쓰신 최형심 시인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세상 어디에나 이런 선수교체는 결과를 떠나서 하나의 환기가 되는 기분을 주는 듯해요. 그러고 보니 교체라는 딱딱한 말보다 환기가 잘 되는 시편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시조도 많이 창작하시는데 시론이 있다면?
시를 쓸 때는 내가 얼마나 나와 내 주변의 사물과 분위기와 잘 교감이 됐느냐가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막연한 상상이나 관념으로 쓰지 않으려 해요. 대상과의 살아있는 교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요. 왜냐면 실물적인 감정이나 생각, 감각 등이 선행되지 않으면 어떤 스타일이 시들이라도 활기가 떨어진다고 봐요. 추상적인 묘사든 사생적인 묘사든 혹은 진술이든지 간에 실체적인 교감과 교호가 필요한 것 같아요.
교응하고 교감한 느낌을 언어의 생물이 되게 하는 프로세스가 생략이 되면 안 되겠다 여기는 건 제가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에 더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것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즐거움의 영역으로 삼으려 해요. 소통의 신속성과 방식과 매체는 발달했지만 현대사회가 갖는 맹점 중의 하나는 진실되게 교감하려 하느냐하는 문제에요. 시는 일방성이 아니라 다자성을 벌려주고 그 진의를 받아 시로 번져내주는 역할이라고 봐요. 나의 목소리는 사실 상대방의 목소리 속에 있게 해야 더 좋은 것이라 봐요. 그래서 시를 쓰는 마음은, 나누자 품자 번지자 하는 것이죠. 그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고 행위이며 언어라고 봐요.
-시집 감상법?
이번 시집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너무 어렵지 않게 편안히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시집에 있는 언어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어우러진 공간이라 볼 수도 있어요. 자연스레 여행하는 기분으로 자기 마음을 풍경처럼 보면서 선선하면서도 때론 고요하고 더러 그리움이 갈마들기도 하면서 시의 말과 느낌과 읽는 이의 마음이 교감했으면 좋겠어요. 우연한 동무를 만나듯이 작정한 말들을 억지로 지어낼 필요가 없는 친구를 곁에 두듯이 그리고 시집 속의 소슬한 산책길을 걸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원하는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읽기의 발걸음이면 충분하겠지요.
-애착이 가는 시 한 편 소개
시 <노각>이 있어요.
노각
노각이란 말 참 그윽하지요
한해살이 오이한테도
노년이 서리고
그 노년한테
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말,
선선하고 넉넉한 이 말이
기러기 떼 당겨오는 초가을날 저녁에
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
수박 향 같기도 하고
은어(銀魚) 향 같기도 한
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
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
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
아무려나
서로 검불 같은 생의 가난이 울릴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붓한 집 한 채 지어 건네는 맘
사랑이 그만치는
늙어가야 한다는 말 같지요
노각이라는 말 늡늡하지 않나요
반그늘처럼 늙어 떠나며
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
누군가에게 벗어줄 수 있다는 거
은어 향에 밴 수박 향서껀
늦여름 거쳐 가을 허공이든
그대 혀끝이나 귓볼에 스친 우박이든
저물지 않는 말간 상념의 맛집
내 욕심을 늙히어 그대에게
집 한 채 물려주고 가는 맛 같은
노각이라는 말 낙락하지요
<감상>
모든 생명체가 생로병사를 경험하지만, 하루살이 곤충이나 한해살이 식물의 노화에 대해 생각해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시인은 “노각”이라는 단어가 “한해살이 오이한테도/ 노년이 서리고/ 그 노년한테/ 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선선하고 넉넉한” 말이라고 기뻐합니다. 그러고는 “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 수박 향 같기도 하고/ 은어(銀魚) 향 같기도 한/ 아니 수박 먹은 은어향 같기도 한/ 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 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한 향이 난다며 세월을 품은 향기를 노래합니다. 시를 읽고 있으면 “늙어 떠나며/ 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 누군가에게 벗어줄” 수 있는 노각이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은어 향처럼 잔잔한 기억을 남기며 늙어가는 것도 멋진 일일 것 같습니다. -최형심(시인)
오이는 어쩌자고 저럴까 싶었지요. 덜 익으면 쓰거나 시어야 하거늘 한 모금 독이 없어 풋열매를 다 내어주니까요. 여름내 늙을 새도 없이 밥상에 오르지요. 오이무침, 오이소박이, 오이냉국이 되어 더위를 식혀 주지요. 다 따먹은 듯해도 한두 개쯤 이파리 사이로 내미는 늙은 얼굴은 뭉클하기도 하지요.
노과라는 말이 맞을 듯하지만, 노각이라 부를 이유가 생겼군요. 검불 같은 생에 지어 올린 말씀의 전각이 우뚝하군요. 서로가 서로에게 서리고 배인 삶이라면 가난하다고만 할 수 없겠군요. -반칠환(시인)
-앞으로의 계획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으니 좀 더 호젓해졌으면 싶어요. 그러나 여전히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여행도 하고 싶지만 그럴 만한 계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인문학적인 인물에 대한 글을 공부를 해서 번지듯 쓸려고 해요. 그게 가능하다면 가능해지고 싶어요. 게으름을 줄이고 노력하여야겠지요. 무엇이나 쓰는 일은 나를 밝히는 일만이 아니라 나누는 일이어야 하기에 어떻게 나누는 것이 좋은가 궁리가 깊어질 듯싶어요.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부족한 역량을 기르고 생각을 듬쑥하고 훤칠하게 키우려는 수양과 수행을 조금씩 번져가려고 해요.
-뷰티라이프 독자들께
이완근 선생을 비롯하여 뷰티라이프 독자들은 늘 미(美)를 사랑하고 기르고 창조하는 아름다운 분들이십니다. 더불어 이 아름다움에는 들 뒷배처럼 혹은 아리땁고 우아한 마음의 원천처럼 시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 시는 늘 다솜을 기르고 북돋우며 나누는 것이기에 시로 대화할 수 있는 마음이 일상에 넘치시기를 바래요. 아름다움으로 소통하고 위로하며 새로운 미를 창조하고 연대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사회에 소중한 분들이십니다. 부족한 시집이지만 성원해 주시구요. 무엇보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이 여름을 보내시기 축원합니다.
<뷰티라이프> 2024년 8월호